작가의 변

이 글은 1950년대,
6·25 전쟁이라는 거대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버텨야 했던 한 소녀—
나의 어머니 신기중 마리아께서
실제로 겪으셨던 삶의 조각들을 모아
작은 등불처럼 꺼내놓은 이야기다.

모진 바람이 불고,
세월의 언덕마다 상처가 쌓여도
어머니는 끝내 미소를 잃지 않으신 분이었다.
신앙을 심장 깊숙이 간직한 채,
토마스 아버지를 만나 2남 2녀의 자녀를 품고
사랑과 희생으로 가정을 지켜낸,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던 삶.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던 이야기들.
그 기억의 잔향을 가슴에 품어 다시 적는다.


그 시절의 공포와 굶주림,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맞부딪던 순간들 속에서조차
어머니는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짙은 어둠 한가운데에서
우리 가족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어 주셨다.

이 글은 기록이 아니라,
어머니께 바치는 사랑의 기도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리움의 고백이다.

그 참혹했던 전장에서 핀 꽃_ 어린 소녀 마리아의 이야기

▶ 할머니와 나 – 오래된 따스함의 풍경

마리아가 기억하는 첫 번째 세상은
겨울 아침 햇살이 할머니의 손등 위에 내려앉던 순간이었다.
잔잔한 금빛이 주름 사이로 흘러들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온기를 만들어내던 풍경.

할머니는 마리아를 품에 안고
할머니는 마리아를 품에 안고 툇마루에 앉아,
부드러운 파도처럼 잔잔한 노래를 들려주셨다.

“우리 마리아는 참 곱구나.
네 어미도 저런 눈빛을 지녔지.
사람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참 고운 기운이었단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먼 옛날에서부터 흘러와
마리아의 가슴 속에 잔잔한 호수처럼 고였다.

눈보라가 지붕을 두드리던 날이면
할머니는 화로에 손을 데워
차가운 마리아의 발을 조심스레 감싸며 말했다.

“이 작은 발로… 참 많이도 뛰어다녔구나.”

그 말에 마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도와야지요. 제가 있잖아요.”

그때 할머니가 지으시던 눈가의 주름진 미소—
그 미소는 마리아에게
평생을 비춰주는 첫 번째 불빛이 되어
그녀의 가슴 속에 조용히 새겨졌다.

▶ 내 아버지 – 강함 뒤의 허물어진 그림자

마리아의 아버지는,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울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 시장에서 깡패들과 맞선 날

어느 여름, 마포 시장은 소란스러웠다.
악취와 먼지 사이로
깡패 몇이 상인들을 몰아붙이며 돈을 강탈했다.

그 순간, 군중을 가르는 듯
아버지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여긴 당신들이 휘두르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 등골을 빼먹을 생각이면 다른 데로 가시오.”

말끝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 말 아래에는 도리와 분노,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주먹을 들지 않았으나
그날은 누구보다 강하게 빛났다.
깡패들은 결국 발길을 돌렸고,
사람들은 아버지를 ‘의로운 사람’이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저… 사람답게 산 거요.”

● 두려움과 죄책감의 밤

하지만 밤이면
그 강함은 조용히 무너졌다.

술기운에 흐릿해진 눈,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잃고 갈라져 가는 시대 앞에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껴안고 앉아 있던 아버지.

“마리아야…
할머니… 꼭 지켜드려야 한다.
아버진… 지금 상황으론…”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던 그의 모습은
마리아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떠나던 날,
아버지의 뒷모습은
전쟁 직전의 하늘처럼 흐릿하고 불안해 흔들리고 있었다.

▶ 전쟁의 그림자 – 서울 마포에 내려앉은 침묵

1945년,
해방의 기쁨은 짧게 빛났다.
하지만 그 빛의 그림자는 길고 깊었다.

1950년,
도시는 보이지 않는 균열로 갈라져갔고,
소문은 땅의 숨결처럼 스며들었다.

“전쟁 난다더라…”
“북에서 군이 움직인다는데…”

그리고 6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
땅이 뒤집히는 듯한 울림이 서울을 뒤흔드렀다.
공포는 한순간에 도시를 삼켰다.

사람들은 남쪽으로 흘러갔고,
마포의 골목엔
날카로운 침묵만이 남았다.

마리아와 할머니는
그 침묵 속에 머물렀다.

▶ 전쟁 속의 마리아 – 두려움과 성장의 경계

북에서 내려온 군인들은
마리아를 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밥은… 먹고 사니?”
“할머니는… 편찮으신가?”

그들의 말투는 낯설었지만
눈빛은 지쳐 있었다—
오래 방황한 사람들만의 눈빛.

마리아는 깨달았다.

전쟁 속 사람들은
악마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었다.
그저 길을 잃은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새벽마다 집을 뒤지는 손길은
달랐다.
그럴 때면 마리아는
마루 아래로 내려가
흙 냄새 속에서 숨을 죽였다.

“나는… 괜찮아.
할머니가 있으니까…”

그렇게 되뇌던 작은 용기는
어느 겨울 새벽,
차갑게 산산이 부서졌다.

할머니는 조용히 숨을 놓으셨다.

마리아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할머니… 오늘은 좀 더 쉬시는 거죠?
제가… 따뜻한 밥 해드릴게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저 깊은 잠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웃들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불빛

식량이 모두 떨어져
굶주림의 그림자가 문턱에까지 차오른 날,
마리아는 외투 하나만 걸치고
옆 동네를 헤매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골목.
텅 빈 집들.
사람의 체온이 사라진 공간들.

그때,
문틈에서 아주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애야…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아주머니는
마리아의 손에 쌀과 보리를 쥐여주었다.

“네 할머니…
참 곱고 선하신 분이었지.
넌 어릴 때부터 싹싹했어.
잘 버티고 있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의 가슴 어딘가에서
가늘고 약한 빛이 깜박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마리아와 소년 – 전쟁이 만든 짧은 봄

무너진 담장 아래에서
마리아는 또래의 소년을 만났다.

얼굴은 먼지투성이.
그러나 눈동자는
희미한 희망처럼 빛나고 있었다.

“너도… 혼자야?”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족… 남쪽으로 가다가
놓쳐 버렸어.
나만… 남았어.”

둘은 며칠 동안
작은 세계를 함께 만들며 버텼다.

얼어붙은 연못에서 고드름을 깨 마시고,
찬 바람이 드는 빈집에서
낡은 담요 한 장을 나눠 덮었다.

소년은 어느 날,
조용히 말했다.

“우리… 살아남자.
누군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그 말은
마리아의 마음에 작은 불빛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인연은
봄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년은 가족을 찾아 길을 떠났고,
마리아는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날 밤,
마리아는 속삭였다.

“할머니…
저 아이도… 꼭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가족의 귀환 – 흩어진 마음이 돌아오는 자리

전쟁이 잦아들자,
피난 갔던 사람들은
하나둘 마포로 돌아왔다.

닫혀 있던 문들이 열리고
마을은 다시
사람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섰을 때,
그는 방 안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말없이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덮으며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슬픔은 분노가 되어 터져 나왔다.

“마리아!
왜… 왜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말하지 않았어?!”

회초리가 허공에 그려졌지만
마리아는 아버지의 눈에서
분노가 아니라
깊은 죄책감과 슬픔을 보았다.

할머니를 지키지 못한 아들의 울음.
어린 딸을 홀로 남겨둔 아버지의 통곡.

마리아는 속삭였다.

“아버지…
이제 오셨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그 말은
아버지를 용서하는 말이자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말이었다.

▶ 에필로그 – 불빛 하나로 버틴 시절

마리아는 전쟁 속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할머니의 품,
소년과의 짧은 우정,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까지도.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녀는 잃지 않고 가져온 것이 있었다.

사람을 믿는 마음.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상처를 견디는 방법.
그리고 흔들려도 꺼지지 않는 빛.

전쟁은 그녀를 꺾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을
더 맑고 단단한 빛으로 만들었다.

훗날 마리아는 조용히 말했다.

“어둠 속에서 가장 오래 남는 건…
사람이 건네준 작은 불빛이었단다.”

그 불빛이야말로
그녀를 끝까지 살아 있게 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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